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메이지 신궁 (문단 편집) == 상세 == [[메이지 덴노]]와 [[쇼켄 황후]] 부부를 제신(祭神)으로 받든다. 메이지 신궁에는 쇼켄 황후가 '쇼켄 황태후'란 이름으로 봉안됐다. [[다이쇼 덴노]]가 즉위한 뒤 [[쇼켄 황후]]가 사망했으므로, 당시 기준으로 (생모는 아니지만) 천황의 어머니, 즉 황태후였기 때문이다. [[일본]]에서도 '[[메이지 덴노]]의 아내로서 신궁에 봉안할 경우에는 황태후보다는 황후라고 칭함이 합당하지 않느냐.' 하는 의견이 많다. [[일본어 위키백과]]에 따르면, 본디 '쇼켄 황후'라는 명칭으로 봉안해야 마땅했지만, [[궁내청|궁내대신]]이 실수로 '황태후'라고 적어 다이쇼 덴노로부터 재가를 받았기 때문에 그렇게 진행되었다고 한다. 이후 칭호를 정정하자는 의견이 나왔지만, 한번 정한 이상 바꾸는 것도 황공하단 이유로 지금까지 쭉 이어졌다고 한다. [[메이지 덴노]]는 1912년(메이지 45년)[* [[메이지 덴노]]가 사망한 당일에 [[다이쇼 시대|다이쇼]](大正)란 연호를 공식적으로 시작했다. 그러므로 1912년 7월 30일은 메이지 45년이자 다이쇼 1년이다.] 7월 30일, [[쇼켄 황후]]는 1914년(다이쇼 3년) 4월 9일에 각각 사망했다.[* [[일본어 위키백과]]나 [[한국어 위키백과]]는 [[쇼켄 황후]]의 사망일이 1914년 4월 9일이라고 설명한다. 하지만 메이지 신궁 공식 홈페이지에서는 사망일이 4월 11일이라고 설명하며, 일본의 당시 신문들도 1914년 4월 11일에 쇼켄 황후가 사망했다고 급전으로 보도했다. [[일본어 위키백과]]에 의하면 실제 사망일은 4월 9일이 맞으나, 당시 [[궁내성]] 대신이던 와타나베 치아키의 궁내성 내장두(內蔵頭) 시절 받았던 [[뇌물]]로 인해, 와타나베를 경질하기 위해 여러 절차가 겹쳐서 이렇게 되었다고 한다. 아무튼 지금도 메이지 신궁과 [[일본 황실|황실]]은 4월 11일을 쇼켄 황후 제사일로 지낸다.] 이후 지금 자리에 메이지 신궁을 지어, 1920년(다이쇼 9년) 11월 1일 낙성식을 겸하여 진좌제를 거행함으로써 [[메이지 덴노]] 부부의 신위를 봉안했다. [[제2차 세계 대전]] 말기, [[일본]]의 패전이 거의 눈앞으로 다가온 1945년 4월 14일에 [[미군]] 공습으로 건물 대부분이 파괴됐다. 패전 이후인 1946년 5월에 부지에 가건물을 짓고 축제를 열었다. 그 뒤 본격적으로 재건을 시작하여 1958년 11월에 다시 낙성하였다. 경내 부지만 약 20헥타르, 전체 부지는 약 73헥타르(22만 평 남짓) 정도로, [[일본]] 내 허다한 [[신사(신토)|신사]] 중에서도 가장 큰 편에 든다. 가는 방법은 [[JR 동일본]] [[하라주쿠역]]이나 [[도쿄메트로]] [[도쿄메트로 후쿠토신선|후쿠토신선]] 또는 [[도쿄메트로 치요다선|치요다선]] [[메이지진구마에<하라주쿠>역]]에서 도보로 1분 정도. 입구까지만 도보로 1분 정도 본 신궁까지는 꽤 긴 참배로를 걸어들어 가야 한다. 한 5~6분 정도 신궁에서 동쪽으로 가면 메이지 신궁 야구장 옆에 메이지 신궁 외원(明治神宮外苑)이란 시설이 나온다. 메이지 천황이 사망했을 당시에는 군대의 연병장이었는데, 여기에 천황의 시신을 운구하여 장례식을 치른 이후로 메이지 천황을 기념하는 공원처럼 되었고, 메이지 신궁 창건 이후로는 신궁의 부속시설이 되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